매출 1,000억 원 규모의 유통·제조 기업이 AI 도입 견적을 받았습니다. 9개월에 8억 원이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만난 대표님이 받아 든 숫자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너무 느리고 비쌉니다. 문제는 받아 든 쪽이 그걸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기간과 비용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원래 이 정도 가격대인지, 그만큼 쓰면 원하는 수준에 닿기는 하는지 비교할 기준 자체가 없습니다.
물론 그만한 규모와 기간이 정말 필요한 기업도 있습니다. 다만 그 회사의 실제 필요는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8억이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왜 시장은 잘못된 AI 도입 비용을 내놓는 걸까요?
AX 성숙도 모델 5단계
견적을 판단하려면 잣대가 필요합니다. 지금 AIDP는 기업의 AX 성숙도 상태를 5단계로 봅니다.
- Lv0 암묵 운영 : 핵심 업무의 지식·판단 기준·데이터가 조직의 자산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머릿속, 개인 엑셀, 메신저 대화에 존재한다.
- Lv1 데이터 정합(데이터 정리) : 시스템 간 같은 항목이 같은 값을 갖고, 마스터 데이터(품목·거래처·단가·BOM)가 단일 기준을 가지며, 오차가 측정·관리된다
- Lv2 프로세스 정형(워크플로우 정리) : 일이 흐르는 경로와 예외 규칙이 시스템에서 관찰된다.
- Lv3 지능 보조 운영(AI Application) : AI가 정형화된 업무 경로 안에서 특정 구간을 보조하고, 그 효과가 숫자로 측정된다.
- Lv4 자율 운영(AI Agent화) : 정해진 범위 안에서 AI가 판단과 실행과 기록을 끝까지 완결하고, 사람은 예외와 정책만 관리한다.

이 성숙도 모델은 하나의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전 단계가 다음 단계의 원료로 이어지기 때문에, 건너 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합된 데이터가 없으면 정형화할 프로세스가 관찰되지 않고, 정형화된 프로세스가 없으면 AI에게 시킬 업무의 단위가 정의되지 않습니다. 건너뛴 단계는 사라지지 않고 후에 재작업 청구서로 돌아옵니다.
현재 고객사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리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단계를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처방을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전사 AI 플랫폼을 설계하고 수십 페이지짜리 로드맵을 그려놓았는데, 정작 현장에서는 엑셀 하나 정리되지 않은 채 프로젝트가 표류합니다. 저는 이것을 '시장의 오진'이라고 부릅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기업은 대부분 0단계
2026년 5월 기준, AIDP가 6주 동안 진행한 무료 AX 진단 52건 가운데 37건, 약 70퍼센트가 0단계였습니다. 무료 진단을 신청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표본이 한쪽으로 쏠렸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업종이 제조와 유통, 물류, 건설로 다양했는데도 공통점이 놀랄 만큼 일관됐다는 점은 짚어둘 만합니다.
진단을 받은 회사들을 보면, 완전한 아날로그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엑셀을 쓰고 있고 사내 시스템도 일부 있습니다. 정산과 발주, 재고, 승인, 고객 응대가 나름의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겉에서 보면 시스템이 있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풍경이 달라집니다. 시스템은 기록을 남기는 장부 역할만 하고, 일의 진짜 맥락은 엑셀과 카카오톡과 담당자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가 관찰한 한 유통 기업의 정산 업무가 그랬습니다. 정산 기준 데이터는 엑셀 파일 여러 개에 나뉘어 있었습니다. 거래처별 예외 조건은 담당자의 카카오톡 대화방 어딘가에 적혀 있었습니다. '이 건은 이번 달에 넣고 저 건은 다음 달로 미루자' 같은 마지막 판단은 10년 차 실무자의 경험과 감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실무자가 휴가를 가면 정산이 멈춥니다. 퇴사하면 기준 자체가 사라집니다.
한 중견 제조 기업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생산 계획을 세우는 핵심 로직은 ERP가 아니라 공장장이 30년 동안 쌓은 경험에 있었고, 자재 발주 기준은 구매 담당자가 만든 엑셀 매크로에 들어 있었습니다.
ERP가 있어도, 그룹웨어가 있어도, 의사결정의 실제 맥락은 시스템 바깥에 있습니다. 업무 로직이 코드나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의 기억과 습관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회사들은 2단계이고, 그에 맞는 진단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무대에 올라와 있는 플레이어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 견적서에는 시장의 오진이 담겨 있다
다시 8억짜리 견적서로 돌아가겠습니다.
'AI를 도입하고 싶다'는 한마디를 두고, 공급자들은 각자의 언어로 번역을 시작합니다. SI는 구축으로 옮깁니다. 요건을 정의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납품합니다. 컨설팅 펌은 로드맵으로 옮깁니다. 방향을 잡고 단계별 계획을 세워 보고서를 전달합니다. SaaS와 AI 솔루션 업체는 제품 도입으로 옮깁니다. 제품을 제안하고 일정을 잡고 라이선스를 판매합니다.
어느 번역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분명한 강점을 갖고 있고, 예외적인 플레이어도 있습니다. 다만 사업 구조의 성격상, 고객의 전환보다 자기 쪽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SI 계약에서는 요건 정의서에 없던 일이 추가 개발 범위로 잡힙니다. 컨설팅은 로드맵을 그려주되 실행의 책임은 대체로 고객에게 남습니다. SaaS는 제품이 풀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문제를 정의하다 보니, 제품 밖의 문제가 고객의 업무 프로세스 탓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리스크는 어디로 갈까요. 바로 고객에게 갑니다. 요건 정의를 정확히 쓰는 일, 로드맵을 실행할 역량을 갖추는 일, 솔루션에 맞춰 프로세스를 다시 짜는 일. 이 불확실성 전부를 고객이 짊어집니다.
0단계에 있는 회사에게 이건 감당하기 어려운 짐입니다. 업무 기준이 엑셀과 사람 머릿속에 있는 회사가 정확한 요건 정의서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데이터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회사가 AI 로드맵을 어떻게 실행할까요.
공급자도 이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 리스크를 가격에 녹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현장, 흩어진 데이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요건. 이 모든 것에 대한 보험료가 견적서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리스크 비용은 높은데 그것을 통제할 방법은 시장에 없습니다. 그 결과가 비IT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8억이라는 숫자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 높은 이유는 기술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비즈니스 맥락이 구조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업무 기준이 어디 있는지, 예외 조건이 무엇인지, 의사결정이 어떤 흐름으로 이뤄지는지가 보이지 않는 상태. 이것이 견적을 부풀리고 프로젝트를 표류시킵니다.
0단계를 돌파하려면 : 맥락의 구조화, 데이터 루프 그리고 현장
그렇다면 Lv0은 어떻게 벗어날까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1) 맥락의 구조화
사람 머릿속에만 있던 업무 규칙을 누구나 읽고 따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일입니다. 저희는 이것을 온톨로지 구성이라고 부릅니다.
말이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렇습니다. 어느 유통 기업에서는 엑셀의 노란색 셀이 수수료율 예외 적용을 뜻했습니다. 어느 제조 기업에는 이 자재는 리드타임 3주, 저 자재는 긴급 발주 가능이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이 거래처는 월말 정산, 저 거래처는 건별 정산, 반품이 나오면 이런 기준으로 처리한다' 같은 것들입니다. 담당자에게 붙어 있던 이런 맥락을 끄집어내 명시적인 지식 구조로 옮깁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이 여기입니다.
2) 데이터가 그 구조를 다시 다듬는 순환 구조
현장에서 실제 데이터가 쌓이기 시작하면 빠진 예외가 드러나고, 잘못 잡은 기준이 보이고, 몰랐던 패턴이 나타납니다. 그 데이터가 구조를 수정하고, 수정된 구조가 더 나은 데이터 수집을 이끕니다. 이 순환이 돌기 시작해야 AI가 작동할 바닥이 생깁니다.
3) 실행은 언제나 현장에서
이 과정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깔끔한 보고서나 잘 만든 대시보드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담당자 옆에 앉아서 '이 엑셀에서 이 셀은 왜 노란색인가요?'라고 묻는 데서 시작합니다. 회의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슬라이드가 아니라 실제 업무 화면 앞에서 정리하고 가설을 세우고 설득하고 실현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꿨습니다. 2주 단위로 끊어 매 회차 결과를 확인하고 다음 단계를 정합니다. 요건 정의서를 다 쓴 뒤 실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단하면서 실행하고 실행하면서 진단을 고칩니다. FDE가 고객 현장에 상주하며 실무자 옆에서 함께 작업합니다.
앞서 말한 유통 기업에서는 팀이 현장에 머물며 흩어진 엑셀의 정산 기준을 구조화했고, 담당자의 카카오톡에서 예외 조건을 뽑아내 명시적인 업무 규칙으로 옮겼습니다. 특정 실무자에게 걸려 있던 정산 프로세스가 팀 누구나 돌릴 수 있는 시스템이 됐습니다. 제조 기업에서는 공장장 머릿속에만 있던 생산 계획 로직을 구조화하고, 구매 담당자의 엑셀 매크로를 시스템이 읽을 수 있는 발주 기준으로 바꿨습니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어떤 AI 솔루션을 들여도 현장에서 쓰이지 않는 도구로 남습니다.
막힌 곳은 기술이 아니라 맥락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AIDP도 처음부터 이 문제를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AX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저희 역시 고객의 문제를 더 큰 시스템을 짓는 과제로 읽으려 했습니다. 'AI를 도입하고 싶다'는 말을 전사 시스템과 데이터 통합과 AI 기능 개발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더 완성도 높은 시스템을 만들고, 더 많은 데이터를 연결하고, 더 넓은 범위를 한 번에 바꾸는 것이 좋은 처방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들어갈수록 막힌 곳은 기술이 아니라 맥락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졌습니다. 시스템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시스템 바깥에 있는 업무의 진짜 로직을 아무도 구조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오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누군가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희 역시 그 구조 안에 있었고, 그래서 그 구조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AX는 AI 기술을 도입하는 일이 아니라, 회사 안에 흩어져 있던 업무 흐름과 판단 기준과 암묵지를 시스템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일입니다.
AI 전환, 먼저 물어야 할 질문 하나
지금 국내에는 엑셀과 오래된 시스템에 기대 일하면서도 이제는 AI로 다음 레벨에 올라가야 한다고 느끼는 회사가 수없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AI를 통한 성장이 어디로 갈지는 결국 이 회사들에서 갈립니다.
좋은 프로젝트가 정확한 문제 정의에서 시작되듯, AX도 정확한 진단에서 시작됩니다. AI라는 말이 넓고 강력한 만큼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AX의 출발점은 AI가 아니라 진단입니다.
그리고 그 진단의 경험이 시장에 쌓일수록, 8억짜리 견적서 같은 일은 줄어듭니다. 기업은 자기 단계에 맞는 처방을 받고, 공급자는 굳이 얹지 않아도 될 보험료를 덜어냅니다. 현장에서 배운 것을 이렇게 글로 꺼내놓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업무가 어느 레벨에 서 있는지, 그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