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에서 '시스템'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MES와 ERP를 의미합니다. 모든 데이터가 크게 두 가지 시스템 위에 얹히죠. 수주가 도면이 되고, 도면이 부품이 되고, 부품이 제품이 되어 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의 흐름. 이것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두 시스템의 숫자가 서로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납기도, 원가도, 누가 무엇을 언제 해야 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이것이 곧 매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실제 제조 업체 현장에서 두 시스템의 기록이 맞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러한 문제는 왜 발생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은 한 제조사에서 실제로 제가 보고 경험하고 진단한 기록입니다.

십 년째 정착되지 않는 시스템

고객사는 주문 제작 산업기계 제조사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기계를 주문받아 만드는 회사의 일은 여섯 단계로 흐릅니다. 수주가 들어오면 설계가 도면을 그리고, 도면에서 부품 목록이 나오고, 구매가 부품을 사 오고, 부품이 다 와야 제작이 시작되고, 검사를 거쳐 납품하고, 수금으로 끝납니다.

제조 기업 업무 프로세스

이 회사는 그 흐름을 시스템에 올리려고 십 년 가까이 애써 온 회사입니다. 큰돈을 들여 현장 시스템(MES)을 도입했습니다. 부품이 들어올 때와 공정 중간, 출하 전에 품질을 확인하는 검사 화면도 만들어 봤습니다. 하지만 시도할 때마다 얼마 못 가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현장 시스템에 입력을 해도 조회하는 사람이 없었고, 검사 화면은 쓰이지 않았습니다.

십 년의 경험 끝에 경영진이 내린 결론은 '우리 직원들은 변화를 싫어한다'였습니다. 그래서 고객사는 딱 한 가지를 요청했습니다. 생산 현장의 시스템(MES)과 사무 시스템(ERP)을 연동해 달라는 것이었죠. 현장 기록과 사무 기록이 서로 모르는 상태이니, 둘을 이으면 한 화면에서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 현장에서 발견한 세 장면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현장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미팅에서 고객사가 원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 문제는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재고가 음수인 항목이 있었습니다. 재고가 마이너스일 수는 없으니, 값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납기가 2300년으로 입력된 발주 건이 있었습니다. 부품이 274년 뒤에 도착하는 셈입니다.

놀라운 것은 둘 다 시스템이 계산한 값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넣은 값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제가 물어야 할 것은 하나였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왜 이런 값을 넣게 되는가. 이 질문을 안고 9일 동안 10개 부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관찰한 장면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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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속이 종이와 말로 오간다

구매팀은 '늘 도면이 늦게 온다'고 했습니다. 설계팀은 '도면 납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언제까지 넘기기로 했는지, 그 약속 날짜가 시스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도면에서 나오는 부품 목록도 언제 것이 최종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시스템 밖에서 오갔습니다. 설계팀은 목록을 종이로 출력해 구매팀 책상까지 걸어가 올려놓았습니다. 앞 부서에서 뒤 부서로, 뒤 부서에서 앞 부서로 오간 것은 시스템의 기록이 아니라 종이와 말이었습니다.

2) 빈 곳을 사람이 메운다

구매팀에서는 이렇게 종이로 온 데이터들을 시스템에 직접 입력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청한 자재가 들어왔는지가 시스템에 남지 않으니 그것을 묻는 다른 팀의 전화를 계속해서 응대합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입력은 몰아서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납기일이 2,300년이라는 실수가 나옵니다.

3) 시스템과 현장의 업무 순서가 다르다

이전에 만들어 봤다는 검사 화면은 현장이 실제로 검사하는 순서와 달랐습니다. 현장은 일이 흐르는 순서대로 움직이는데, 화면은 다른 순서로 넣으라고 했습니다. 직원들이 싫어해서 안 쓴 것이 아니라, 그 순서로는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변화를 싫어한다'는 결론과 어긋나는 지점이 여기였습니다.

진단 : Lv0. 암묵 운영 단계

구매팀과 설계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어느 쪽이 맞는지를 가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잘못된 접근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늦었다고 말할 기준 날짜가 없으니 두 입장이 모두 참이었습니다. 답은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없느냐에 있었습니다. 없는 것은 셋이었습니다.

  • 약속 날짜 : 설계가 도면을 언제까지 넘길지, 그 날짜가 시스템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늦었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 확정 기록 : 부품 목록 중 어느 것이 최종인지가 시스템에 없었습니다. 목록은 종이로 구매팀 책상에 왔습니다.
  • 업무 프로세스 : 검사에서 불량이 나와도 설계로 돌아가지 않았고, 자재가 들어와도 시스템에 남지 않아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셋 다 시스템 안에 없었고, 종이와 전화와 사람의 기억에 있었습니다. 위시켓 AX 성숙도 모델은 이 상태를 Lv0 암묵 운영이라고 부릅니다. 업무의 기록과 판단 기준이 조직의 자산이 아니라 개인의 머릿속과 개인 파일, 메신저에 있는 상태. 시스템이 있어도 실제 일은 시스템 밖에서 도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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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 시스템 연동 대신, 없는 약속부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약속이 비어 있는 곳에서 기록이 끊기거나 오염되고 있다. 그래서 새 시스템이 아니라 없는 약속부터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설계와 구매, 품질로 이어지는 영역을 Lv1 데이터 정합과 Lv2 프로세스 정형까지 올리자는 것이 핵심이었죠.

첫 번째는 현황판입니다. 제가 착수할 때 회사를 이해하려고 만들어 뒀던 화면을 전 부서로 넓혀서, 수주부터 설계, 구매, 제작, 검사, 수금까지 어떤 일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택배 조회처럼 업무 흐름이 보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이 회사에 없었던 것을 하나씩 만들자고 했습니다. 부품 목록과 도면을 전달하는 날짜를 입력하는 칸. 설계팀이 종이를 들고 걸어가는 대신 '확정'을 누르면 되는 자리. 불량 이력이 전달되도록 그 이력을 받을 담당자를 명시하는 것. 직원들이 이미 입력하던 것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얹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을 심을 자리가 필요해서 사무 시스템은 다시 만들기로 했고, 현장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중에 한 부서장이 말했습니다. '구멍 나는 걸 잡아내는 시스템 말고, 잘 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스템이면 좋겠다.' 정해져 있지 않던 것이 약속되고 기록되기 시작하면, 처음엔 감시받는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나를 평가하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그제야 직원들이 기록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움을 겪던 구매팀이 이 기록을 가장 유용하다고 느끼길 바랐습니다.

다만 이렇게 흐름을 잇는 일은 실무자 사이를 잇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완료'라고 정의할지, 잘한 사람에게 무엇을 줄지. 시스템이 만들 수 없는 것은 경영진이 정해야 합니다. 시스템은 기준을 강제할 수는 있어도 행동으로 옮겨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영진이 정해야 하는 목록을 따로 추려 제안서 뒤에 붙였습니다.

뺀 것도 둘 있습니다. MES와 ERP 연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이 기록되지 않고 기록이 다음 사람에게 흐르지 않는 회사에서 끊어진 두 시스템을 묶으면, 잘못된 기록이 두 곳으로 복제될 뿐입니다. AI도 넣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정확하게 흐르지 않는 회사에 AI를 얹으면 틀린 기록이 더 빠르고 더 그럴듯하게 퍼집니다. 좋은 기록이 흐르기 시작하면 그때 AI가 할 일이 생깁니다.

숫자가 안 맞는 시스템,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제조업에서 시스템끼리 숫자가 안 맞는 이유는 대개 시스템이 아닙니다. 두 시스템 사이를 사람이 종이와 전화로 메우고 있어서 입니다. 부서 사이에 약속 날짜가 없고, 무엇이 확정인지가 시스템에 없고, 뒤에서 생긴 일이 앞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기록은 시스템 밖에서 돌다가 몰아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연동보다 먼저 볼 것은 셋입니다. 앞 공정이 뒤 공정에 '언제까지'를 시스템 안에서 약속하는 칸이 있는가. 도면과 부품 목록 같은 확정 사항이 시스템 안에서 확정되는가, 종이나 메신저로 오가는가. 뒤 공정의 불량과 지연이 앞 공정으로 돌아가는 경로가 있는가. 지금 이 주문이 어디까지 갔는지 알려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면, 셋 중 하나는 비어 있는 것입니다.

위시켓 AX 성숙도 모델로 말하면 이 일은 Lv0 암묵 운영에서 Lv1 데이터 정합으로 올라가는 일입니다. 기록이 개인 파일이 아니라 공유 시스템에 남고, 같은 것이 어디서나 같은 값을 갖는 상태입니다. 그다음이 Lv2 프로세스 정형, 일이 흐르는 경로와 예외가 시스템에서 보이는 상태이고, AI는 그 위 Lv3에서 일할 자리가 생깁니다.

레벨은 건너뛸 수 없습니다. 정합된 기록이 없으면 정형할 프로세스가 보이지 않고, 정형된 프로세스가 없으면 AI에게 시킬 일의 단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업 AX가 AI 도입이 아니라 기록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