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회사의 하루는 대개 메신저에서 시작됩니다. 아침에 거래처 단톡방에 발주 문자가 올라오면, 담당자가 그걸 읽고 어느 거래처인지, 어떤 품목인지, 몇 개인지 판단해 전산 양식에 옮깁니다. 매주 자사몰 재고를 창고 재고와 손으로 맞춥니다. 월말이 되면 같은 판매의 매출 날짜가 취합본과 ERP에서 제각각이라 숫자를 대조해야 합니다. 대표는 ERP 대신 팀장이 만든 취합본을 봅니다.
익숙한 장면인가요? 제가 만난 유통 회사들은 업종도 규모도 달랐지만, 모두 발주·재고 관리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글에서는 제가 AIDP FDE로서 경험한 현장을 기반으로, 유통 회사의 고질병인 발주·재고 관리 문제의 원인과 해결법을 AX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유통 회사에서 반복되는 문제 증상 3가지
1) 사람이 옮기는 발주
주문은 거래처의 언어로 오고, 전산은 우리 회사의 언어를 요구합니다. 그 사이를 사람이 번역하고 있는 상태가 첫 번째 증상입니다. 유통 업계에서 이 증상이 유독 반복되는 이유는 표기 기준을 우리가 아니라 거래처가 정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품목을 거래처마다 다르게 부르고, 한 품목에 여러 표기가 붙습니다. 주문이 오는 길도 거래처가 고릅니다. 카톡으로 보내는 곳, 이메일로 보내는 곳, 포털에 올리는 곳, 본사에서 내려보내는 곳이 한 회사 안에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산 앞에는 늘 사람이 대기해야 합니다.
2) 장부마다 다른 날짜
같은 판매 한 건을 언제 매출로 볼지가 장부마다 다른 상태가 두 번째 증상입니다. 판매 채널마다 정산 시점이 다르고, 채널 수만큼 장부가 있는 유통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수입 한 의류 소매 고객사에서는, 같은 판매건이 실무자 취합본에는 주문일로, ERP에는 출고일로, 백화점 정산에는 배송 완료일로 잡혀 있었습니다. 상품·재고·주문·정산 정보가 ERP와 자사몰, 엑셀, 카톡, 구글 시트에 흩어져 같은 데이터를 여러 번 입력하고, 월 마감이 되면 취합본 안에서도 합계가 어긋났습니다. 어느 쪽이 맞느냐고 물으면 답이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3) 시스템에 찍히지 않는 숫자
시스템은 있는데 실제 일은 시스템 밖에서 돌아 숫자가 쌓이지 않는 상태가 세 번째 증상입니다. 예를 들어 ERP는 재고 개수를 하나로 셉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그 개수는 다 같은 개수가 아닙니다. 불량이 섞여 있고, 샘플이나 소모품처럼 ERP에 품목 등록조차 안 된 것도 있습니다.
시스템의 개수와 실제로 팔 수 있는 개수가 어긋나는 순간, 사람은 시스템을 고치는 대신 시스템을 버리고 자기 엑셀과 머릿속으로 돌아갑니다. 그때부터 시스템에는 숫자가 쌓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실무자에게 돌아갑니다.
유통 회사의 고질병, 자동화가 답일까?
보통 이런 증상을 가진 고객사들은 같은 요청을 합니다. ‘자동화 해주세요’. 이 ‘자동화’라는 단어에는 여러 요청이 숨어 있습니다.
- 발주를 사람이 읽어 옮기는 일을 시스템이 대신하게 만들어 주세요.
- 자사몰 재고가 실제 재고와 맞지 않아 매주 손으로 맞추고 있으니 실시간 연동해 주세요.
- 입고에서 출고까지의 흐름과 매출, 영업이익을 한 화면에서 보고 싶어요.
물론 합리적인 요청입니다. 손이 모자라니 손을 대신할 도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근본적인 이유를 파악하지 않고 도구를 만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의 뿌리에는 ‘암묵지’가 있다
세 증상의 뿌리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판단이 담당자 머릿속에만 있고 시스템에 쌓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암묵지’입니다.

판단의 규칙이 직원의 머릿속에만 있으면, 어떤 도구를 가져와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옮기는 발주는 이 의원이 어느 거래처 코드인지, 「○○」가 어느 품목의 어떤 규격인지. 장부마다 다른 날짜는 같은 판매를 언제 매출로 볼지. 찍히지 않는 숫자는 이 재고를 온라인에 내보내도 되는지, 이 값을 시스템에 넣을 만큼 믿을 수 있는지. 도구가 스스로 판단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동 입력은 판단 없이 옮기다 틀린 발주를 더 빠르게 만들고, 재고 연동은 불량 재고까지 온라인에 내보내며, 대시보드는 장부마다 다른 숫자 중 하나를 골라 보여줄 뿐인 결과를 낳습니다.
이 상태에는 이름, 암묵 운영
위시켓 AX 성숙도 모델은 이 상태를 Lv0. 암묵 운영이라고 부릅니다. 정의는 이렇습니다.
핵심 업무의 지식·판단 기준·데이터가 조직의 자산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머릿속, 개인 엑셀, 메신저 대화방에 존재합니다. 시스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 ERP도 있고 그룹웨어도 있는데, 실제 업무는 시스템 밖에서 돕니다.
AI가 학습하고 판단할 원료(기록된 데이터, 명시된 규칙) 가 없으면 어떤 AI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데모에서 그럴듯했던 것이 현장에서 조용히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따라서 기록과 규칙을 개인 파일이 아니라 회사의 시스템에 남기기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발주·재고 문제를 AI로 푸는 순서 넷
1) 판단을 꺼내 기준으로 세운다
자동화도, 연동도, 대시보드도 결국 흩어진 것을 한곳에 모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모을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면 모은 뒤에 다시 갈라집니다. 그래서 모으기 전에 기준이 하나여야 합니다. 기준을 정하는 일은 화면을 만드는 일보다 지루하지만, 이걸 건너뛰면 도구를 만든 뒤에 같은 문제가 돌아옵니다.
거래처마다 다른 표기를 어느 정본 품목으로 볼지, 같은 판매를 언제 매출로 볼지, 부족분을 총재고 기준으로 볼지 가용재고 기준으로 볼지. 담당자가 매일 머릿속에서 내리는 판단 중 기준이 될 만한 것을 골라 밖으로 꺼내 적는 것이 중요합니다.

2) 확실한 것만 자동화, 애매한 것은 사람이 검수
판단이 필요한 자리를 통째로 자동화하면 틀린 발주가 더 빨라질 뿐입니다. 시스템이 확실한 것과 애매한 것을 스스로 구분해야 하고, 불확실한 것을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시스템에게도 원칙입니다.
하는 일은 둘입니다. 먼저 자동으로 확정해도 되는 조건을 정합니다. 어떤 항목이 전부 확실할 때만 시스템이 넘기고, 하나라도 애매하면 사람에게 질문 형태로 보냅니다.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한 번 답한 것은 쌓여서 다음에는 묻지 않게 합니다. 확정하고, 학습하고, 재사용하는 이 고리가 사람 안에 있던 판단을 회사 것으로 옮기는 실제 경로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검수하는 항목이 많고, 신뢰가 쌓이는 만큼 하나씩 뺍니다.

[참고 사례] 의료 소모품을 파는 한 고객사에서는 거래처 코드와 품목, 수량, 단가가 전부 확실할 때만 자동으로 확정하고 하나라도 애매하면 검수 큐로 보내게 좁혔습니다. 담당자가 고친 표기는 별칭 사전에, 거래처별 규칙은 위키에 남아 다음 발주부터는 묻지 않습니다. 가공식품을 도매하는 회사에서는 자동화 초기에 상세한 체크리스트로 사람이 검수하고, 안정되는 만큼 항목을 하나씩 빼기로 했습니다.
3) 덜어내기
데이터가 깨끗하지 않은 자리에 자동화나 연동을 걸면 오류가 그대로 퍼집니다. 그래서 자동화하면 안 되는 자리를 정하는 것이 처방의 절반이고, 요청 목록에서 빼는 결정이 넣는 결정만큼 중요합니다.
하는 일은 요청 하나하나에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 자리의 데이터가 사람 손 없이 흘러도 되는 상태인가. 아니라면 셋 중 하나를 고릅니다. 사람의 판단을 남기거나, 범위에서 빼거나, 순서를 뒤로 미룹니다.
[참고 사례] 수입 신발을 파는 고객사에서는 불량이 섞여 있는 총재고를 자사몰에 자동으로 연동하지 않기로 하고, 온라인이 바라보는 판매 가능 재고 필드를 따로 두었습니다. 회계는 시스템 범위에서 빼고 세무사무소 기장을 유지했습니다. 대표용 대시보드는 뒤로 미루고, ERP에 등록조차 안 돼 있던 재고 범주를 먼저 잡았습니다.
4)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인계한다
제가 빠진 뒤에도 일은 돌아가야 하는데, 문서 한 벌로 인계하면 그 문서를 아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판단이 다시 들어갑니다. 그러면 처음의 병이 자리만 바꿔 재발하기 쉽죠.
그래서 인계물을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 두도록 설계합니다. 상태를 볼 수 있는 점검 화면, 흔한 장애를 스스로 고치는 장치, 사람이 답한 것이 쌓이는 학습 기록. 예외가 생기면 어디에 기록할지 경로를 정해 두고, 필요하면 정기적으로 가르치는 자리를 남깁니다.

AI, 자동화는 그 다음에 시작된다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때 자동화와 AI를 넣고 성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기준을 세웠으니 도구는 읽을 것이 있습니다. 「○○ 두 개」가 어느 품목인지, 이 판매를 언제 매출로 볼지를 도구가 담당자 머릿속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찾습니다. 확실한 것만 자동으로 넘기기로 했으니 자동화는 틀린 발주를 빠르게 만드는 대신 확실한 발주만 전산에 닿게 하고, 사람이 답한 것이 쌓일수록 자동으로 넘어가는 몫이 커집니다. 덜어냈으니 자동화하면 안 되는 자리에는 자동화가 걸리지 않고, 불량이 섞인 재고가 온라인에 나가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시스템에 인계했으니 우리가 빠진 뒤에도 도구는 사람 머릿속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도구가 성패를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구를 얹기 전에 한 넷이 도구의 성패를 정합니다.
마치며
여러분 회사는 어떤가요? 세 증상 중 하나라도 눈에 익다면, 실무자가 매일 다시 하는 판단 하나를 골라 보시기를 권합니다. 거래처에서 날아오는 ‘ㅇㅇ 두개’가 어느 품목인지, 이 재고를 온라인에 내보내도 되는지, 이 판매를 어느 날짜의 매출로 잡을지. 그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적혀 있는지 찾아보세요. 사람 머릿속에만 암묵지로 남아 있다면, 도구를 들이기 전에 그 판단부터 꺼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것이 제가 유통 회사 프로젝트에서 매번 먼저 한 일이었습니다.




